바람의 현상학
물푸레나무의 밑동에서 우듬지까지 흔들고 지나가는
저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나
내가 만질 수 없는 곳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곳을
아무렇게 저리도 당당하게
황망하게 또는 우아하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몸짓으로
세상의 끝자락, 아스라이 하늘 기슭까지 닿는
새들의 깃털 같은 자유를
나뭇잎에 설핏 비친 햇빛의 눈으로 바라본다
저 무한 능동의 투명한 손길
눈부시게 넓어지는 허공의 둘레
코끝을 스치는 은방울 향기가 느린 오후 세시를
지그시 누르고 지나가는 시간이다
국적 없는 바람의 길에 편승하여 젖어 있는 날개를
한껏 털고 싶은 초록의 시간이다
바람보다 더 멀리
바람보다 더 높이
바람보다 더 나지막이
수많은 바람의 계절을 온몸으로 통과하며
내 속의 바람을 펼치고, 누르고, 풀어놓았던 습관에서
벗어나고 싶은 시간을 걸어간다
아카시아 나무의 하얀 종을 쳐서 향긋한 울림으로
이파리마다 새겨진 파란 기억들을 읽고 가는
저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나
문현미 1998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가산리 희망발전소로 오세요』, 『아버지의 만물상 트럭』, 『깊고 푸른 섬』 등이 있다.
출처 : 시 산 맥
글쓴이 : 조희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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