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사로잡은 詩

[스크랩] 2017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김태인-갈라파고스

그린민트 2017. 1. 5. 12:49

 갈라파고스


 김태인


  어둠이 입술에 닿자 몸 안의 단어들이 수척해졌다 야윈 몸을 안고 섬 밖을 나갔다가 새벽이 오면 회귀하는 조류(潮流), 금이 간 말에서 아픈 단어가 태어나고 다 자란 말은 눈가 주름을 열고 떠나갔다

 

  남겨진 말의 귀를 열면 치어들이 지느러미를 털며 들이 닥쳤다.은어(隱語)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욕설이 귀를 깨문 몸 안에 손을 넣어 상한 심경을 꺼내 놓자 말수 줄은 언어의 생식기는 퇴화되어 갔다

 

  파도를 멀리 밀어낸 밤은 등대를 잡고 주저앉았다 부레를 떼어낸 언어는 외딴섬에 스스로를 격리시켰다 발굽에 물갈퀴가 생기고 단어에 부리가 자랐다 비늘이 깃털로 변해 조류(鳥類)로 진화했지만 텅 빈 죽지에 감춘 내재율을 버지리는 못하였다

 

  아주 오래된 하늘에 운율이 돌면 첫 문장은 가슴지느러미부터 따뜻해졌다 야윈 말들이 하나 둘 돌아온 섬은 언어의 기원에 종말을 고하고, 밤은 더 이상 섬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동쪽으로 흘러든 난류는 바다거북 등껍질에서 불가사의한 문자를 캐고 암염처럼 굳어버린 죽은 언어를 떼내었다

 

  남쪽 염전에서는 느린 운율과 음가들이 뿔 고동의 귓가에서 보송보송 말라갔다 새벽이 되어 방에 불을 끄면 되살아난 단어들이 몸 안에 환한 섬을 산란하는 것이었다

 

*갈라파고스 - 찰스 다윈이 발견한 섬 혹은 제도.


당선소감

언어 다듬던 섬에서 느낀 진화의 과정


  어느 날, 낯선 조류를 만나 외딴섬에 조난당한 기분이 들었다. 외로운 날을 견디려 몸속에 흐르는 언어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몸이 뒤틀리는 진화의 과정이었다. 그렇게 단어와 운율을 섞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았다. 사람들은 제각기 갈라파고스 섬을 하나씩 가지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섬을 나와 뭍에 오르기도 했지만 여전히 시라는 문장 앞에 서면 늘 부족하고 작아진다. 도반이 되어준 시산맥 식구들에게 늘 고맙다. 문정영, 이진욱, 이상윤, 전비담, 최연수 시인님 그리고 강원대 경영대학 동료들, 6명의 처제들, 친구들에게 감사드린다. 묵묵히 지켜봐준 아내와 딸, 아들에게 그리고 부족한 시를 선택해 주신 강원일보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김태인(43)

△전북 남원 生

 



심사평



거짓의 언어와 부패한 상상력이 난장을 벌이는 세상이다. 시의 부력(浮力)으로 생명의 새로운 리듬을 창조하고자 하는 신춘의 꽃들을 마주하며 설레었다. 무려 1500여 명이나 되는 응모의 열기를 뚫고 본심까지 올라온 20여 명의 작품을 놓고 고심하였다. 대부분의 응모작이 시적 대상이 모호해 관념성을 벗어나지 못하거나 시의 미덕인 언어의 경제성을 담보하지 못한 작품들이 많았다. 다행히 이런 혐의에서도 자유로운 시적 위의를 갖춘 작품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김서림의 <갈라파고스>와 김형미의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 앞에서>가 심사위원의 눈을 사로잡았다. 김형미는 널리 알려진 소재를 무난하게 형상화하였으나, 시어의 선택과 묘사가 너무 평범하다는 한계를 드러냈다. 김서림은 언어의 문제를 갈라파고스라는 섬과 상징적으로 결합시키며 언어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언어의 생식기가 퇴화”된 절망적인 세상에서도 김서림은 시적 기율을 통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아주 오래된 하늘에 운율이 돌면 첫 문장은 가슴지느러미부터 따뜻해졌다” 혹은“ 단어들이 몸 안에 환한 섬을 산란하는 것이었다” 라는 시 행에서 우리는 응모자의 시에 대한 신뢰를 흔감할 수 있었다. 함께 투고한 작품 <사해문서 외전>도 주목했는데, ‘고독’, ‘고행’ 같은 상투적인 관념어의 남발을 주의하면 좋겠다는 충언을 덧붙여 둔다. 문학의 노화현상이 갈수록 심화되는 한국문단에 젊은 창조의 피를 수혈하는 기쁨을, 김서림 당선자와 함께 나누고 싶다. 오래오래 건필하기를 기원한다.

시인 : 이영춘 고진하





출처 : 시 산 맥
글쓴이 : 최연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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