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화 시집, [가을이 저무는 창가에서]
< 작품 해설>
참신성의 시학 / 김태진(문학평론가, 홍익대 교수)
1.
저 멀리서 마을 버스가 온다. 그때, 시인이 본 것은 버스의 차창이다. 그리고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 버스는 단풍잎 같은 차창을 나부끼며 온다.”
‘단풍잎 같은 차창’, 이러한 표현은 매우 참신한 비유이다. 더구나 ‘가을녘 도로’라는 시적 공간에서 ‘내 마음의 어둠을 한 잎 걷어내고/나는 낙엽 속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발을 내 딛는다’-<마을 버스를 기다리며>에서-라고 표현하여 시인의 감수성을 맘껏 드러내고 있다.
또 바닷가의 파래를 ‘물에 씻기면 씻길수록 더욱/깊은 한숨소리처럼 엉겨 나오는/황록색 생명의 숨결’-<파래를 먹고>에서-이라고 표현하여 사물에 대한 남다른 감성을 드러내고 있고, 가을을 ‘고통과 절망 속에서/주위를 더욱 아름답게 물들이는 가을’로 표현하여 범상치 않은 감성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아울러 일상적으로 대할 수 있는 녹찻잔을 보면서, 시인은 ‘찻잔 속 깊은 곳으로부터/ 고운 연두 빛으로 우러나는/침묵과 고요의 순간들’-<녹차를 마시며>에서-로 표현함으로써 찻잔에 담긴 녹차보다는 그 내면적 이미지를 포착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또 <사막의 연가 2>에서 시인은 커피잔을 ‘이름 모를 사람들의 손길이 무심히 스치고 지나간/어쩌면 아직도 그들의 숨결이 배여 있을/ 조그만 커피잔’으로 표현하여 그 감성의 폭이 매우 넓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같이 폭넓은 감성과 그로 인한 비유의 참신성이 이정화 시인의 시적 특성이다.
시인이 비유가 참신하다는 것은 시적 재질의 풍부함을 의미한다. 이 시적 재질은 그 시인의 시각이 주위의 사물로 넓게 퍼져 나갈 때에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정화 시인의 시각의 궤적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2.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러기에 지나간 세월을 우리는 아쉬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시인은 <작은 떨림>에서 ‘내가 흘려 보낸 시간들은 /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시간들을 바구니에 주워 담을 수 있다면/사과 알처럼 탐스럽게/바구니에 넘쳐나게 담을 수만 있다면/’으로 표현하여 흘러간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표현한다. 이러한 시인의 인식으로 볼 때에 시인의 과거는 제법 애착을 가질 만한 기억들이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목련>에서 보여주는 시인의 시간에 대한 인식은 어둡기만 하다.
‘네가/ 고통과 한숨의 세월 속에서/하얀 꽃잎을 건져 올리고 있을 때/나는 너의 곁을 무심코 스쳐 지나가던/한 줄기 바람이었을지도 몰라//
시인의 시간에 대한 인식은 ‘고통과 한숨의 세월’이다.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에 펼쳐진 시간인식과 비슷하기도 하다.
아울러 같은 시간 인식이 드러난 <오징어>라는 시도 있다.
‘네가 헤엄쳐 왔던 길을/네가 숨가쁘게 달려왔던/무수한 인고의 세월들을//
오징어가 생존해왔던 그 시간들을 ‘인고의 세월’로 표현함으로써 시인의 세월에 대한 인식은 결코 현재에 있어서 집착할 만한 대상이 되지 못할 듯이 보인다.
그리고 시인이 발을 딛고 있는 공간 또한 긍정적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영원히 뛰어 넘을 수 없는/너와 나 사이에 가로막힌/이 슬픈 공간//-<목련>에서
‘빼앗길 수 없는 우리의 꿈은/언제부터인가/날개 잃은 새처럼/지상으로 자꾸만 추락하고/마침내/돌아 올 수 없는 별이 되었다.// -<서울역에서>에서
‘슬픈 공간이나 꿈을 잃어버린 공간’ 이것이 이 시인의 공간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면서 지나간 세월에 대해 아쉬워하고 있는 것은 ‘그리움’ 때문이다.
‘파아란 물감으로 하얀 도화지를 물들이면/내 마음의 여백마다/투명한 그리움으로 피어나는 그대’ -<바다를 그리고 싶다>에서
‘당신에게/가까이 다가가고 싶어도/당신에게 갈 수 없는 나의 안타까움이/노란 그리움으로 물들어/메마른 가지 끝마다 새순을 틔우고/눈부신 꽃으로 활짝 피어났습니다.-<개나리 꽃>에서
‘피멍든 가슴으로/노오란 들꽃을 한아름 피우면/내가 부르지 않아도/나의 이름을 부르며/꿈 속까지 나를 찾아오던 그대/ -<새벽>에서
그리움이란 시간상으로 보면 과거의 것에 대한 애착이다. 그러기에 지나간 기억이 아프더라도 붙잡을 만한 그 무엇이 있다면 인간은 세월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게 된다. 더구나 그 애착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인은 그리움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리움이란/가을 햇살에 핑 도는 눈물처럼/때로는 우리를 당황하게 하지만/가슴 속 깊은 곳에서/저 혼자 물결치는 강물처럼/소리 없이 퍼져 가는/이 아득한 고요//-<그리움이란>1연
이렇게 이 시인의 세월에 대한 인식은 그리움과 어우러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것은 그 그리움의 대상이 명확하지 않은 시편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리운 것은/미치도록 푸른/바다 탓이 아니다//---중략---//바람 부는 오후/무심코 거리에 나섰다가/어디선가 발사된 최루탄 가스에/코끝이 찡해지다가 마침내는/가슴속까지 찡해져 오는/아련한 슬픔의 그림자 하나//-<내가 그리운 것은>에서
불현듯 튀어나온 ‘아련한 슬픔의 그림자’는 무엇일까? 하고 추적을 해보면, 그 해답에 어느 정도 접근하기는 하지만, 위의 시편에서는 그리움의 대상이 하나의 암호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암호화는 ‘과거의 자신’에 대한 숨김이자 새로운 자기에 대한 발견의 출발점일 수도 있다. 그리고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발견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언제인가/내가 우울할 때/어둠 속에서 거울을 바라보았다/거울 속에서/내가 울고 있었다---중략---/불을 켜고/ 거울 속에 담긴 어둠을 내 몰자/빛의 세계가 거기 있었다./한 하늘이 새롭게 열리고 있었다/ -<거울>에서
지금에 ‘울고 있는 나’, 그러나 마지막 행에서 새로운 하늘이 열리고 있다는 표현은 시인의 의식이 과거보다는 현재 및 미래에 대해 열려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화장을 지우고/거울을 들여다보면/낯선 모습의 내가 서 있다. ---중략---화장을 지우며/지금까지 내가 걸어 왔던 길을 지우고/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생각하며/거울 속에 비쳐진 나의 모습을/낯설게 바라본다.’ -<화장을 지우며>에서
‘거울 속의 나’, 이상(李箱)의 <오감도>의 한 시편의 제목을 연상시키는 이 싯귀는 과거를 지우고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며 새로운 자기(낯선 모습)를 발견한다는 내용이어서 이 시인의 시가 결코 과거의 그리움을 드러내는 서정성에만 매달려 있을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이정화 시인은 비유의 참신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다가옴은 사물의 내면을 꿰뚫는 시각을 우리에게 선보여 줌으로써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너는 말이 없지만/가장 많은 말을 네 속에 간직하고 있어//너는 소리치지 않지만/외침보다 더 큰 절규를/네 가슴속에 담고 있어//-<바위>1, 2연
‘고운 님 그리워/차마 다하지 못한 말/가슴 속 깊이 숨겨 두고/-<진달래꽃>에서
‘한 생애를 길어 올려/척박한 땅의 어깨를 딛고 일어나/결코 쓰러지지 않을/초록빛 목숨으로/홀로 선 그대// -<난초>에서
비 내리는 날/우울한 거리의 모퉁이에서/희망처럼 환히 등불을 밝히고/제 한 몸 쓸쓸히 쓰러져 가며/빛이 되어/어둠을 말없이 밝히고 있던 조명등 가게//깨어 있는 자의 슬픈 눈빛을 보았다/잠들지 못하는 자의 고뇌를 읽었다/ -<조명등 가게를 지나며>에서
시인이 시적 대상으로 잡은 것은 ‘바위, 진달래, 난초, 조명등 가게’이다. 일상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들인데, 시인은 이 대상들에다 자신의 생각을 다양하게 투영시켜 낯설치 않게 시화(詩化)하고 있다.
바위의 묵직함은 절규의 간직함으로, 진달래의 붉음은 그리움의 간직으로, 난초는 꿋꿋한 생명력으로, 조명등가게의 불밝힘은 잠들지 못하는 자의 고뇌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가장 일상적인 것을 가장 유사성 있는 표현을 사용하여 시화함으로써 시가 낯설은 일반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시작법이 좀 더 깊어진 형태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명상류(冥想類)’의 시들일 것이다.
꽃잎은 바람에 떨어져도/땅위에 쓰러져 있어도/서러워하지 않는다//---중략---//꽃잎은 땅위에 떨어져서/메마른 땅을 아름답게 수놓아 주고/어두워진 마음들을/하얀 별빛으로 밝혀 주고/햇살 환한 봄날/우리에게 잠시 다가왔다가/때가 되면 총총 걸음으로/소리도 없이 우리 곁을 떠나간다./ -<꽃잎은>에서
마른 곳에서 싹을 틔우고/어둠 속에서 환한 웃음을 피워 올리고/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너는/노란 날개옷 입은/봄날의 작은 천사/ -<수선화>에서
자연은/마르지 않는 詩의 샘물이며/영혼의 음률을 조율하는/잔잔한 바이올린 소리 같은 것.-<자연>에서
당신이 나에게 다가와 앉으실 때까지/나는 그 누구도 앉게 할 수 없는/빈의자//당신의 말씀의 체중으로/당신의 사랑과 은혜로/날마다 가득히 채워집니다. -<빈의자>에서
지상에 떨어진 꽃잎은 우리의 주위를 아름답게 수놓아 주고 우리의 어두운 마음을 환하게 밝혀 주고 말없이 우리의 곁을 떠나간다는 시인의 인식은 자연에 대한 경외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기에 <수선화>와 <자연>에서 그 시적 대상들에 대한 경외감은 계속된다. <빈의자>에서도 ‘당신’이 인간이라기보다는 ‘신(神)’으로 감지되기에 절대자에 대한 경외감이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외감은 세상을 아름답게 보기 위한 시인의 노력이기도 하다. 그것은 세상이란 절망보다는 희망을 발견할 가능성이 더 있다고 시인 자신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책갈피 속에 다소곳이 뉘어 놓으면/너는 내 작은 공간 속에서--중략--//너의 눈물 속에서/더욱 환하게 열리는 세상//나는 너로 인하여/새로운 세상 하나를 가지는 것이다.
-<낙엽>에서
이 시에서 책갈피 속에 끼워 놓은 낙엽은 빛 바랜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장차의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보여주는 새로운 희망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새로운 환한 세상을 볼 수 있으며 꿈 꿀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현재의 어두운 면에서 미래의 밝은 면을 쳐다보는 시인(詩人) 특유의 시각이랄 수 있다.
3.
시인은 현재의 어둠을 뚫고 미래를 꿈꾸기에 더욱 아름다운 존재이다. 손가락 호호 불며 겨울에 날리던 연(鳶)에 소망을 담아 멀리 띄워 보내던 우리의 풍습도 겨우내 몸이 떨리도록 지겹게 떠나지 않던 추위와 불행 등을 멀리 띄워 보내고 새로운 희망을 맞아 들이기 위한 의식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연이 이정화 시인에게는 하나의 운명적 탈출의 도구로 형상화되고 있다.
날아오르고 싶어/사슬처럼 끈질기게 감겨드는/운명의 실타래를 훨훨 벗어 던지고/눈부신 새처럼 자유롭게/하늘을 날아다니고 싶어// - 鳶 1연-
이처럼 시인의 생각은 연을 이용하여 자유를 꿈꾼다. 그 자유는 새로운 세상에서 누릴 만한 자유이다. 현실의 아득함에서 결코 얻지 못하는 자유를 시인은 연을 통하여 공중에서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시도는 시인이 가고자하는 세계를 제시해주는 것이다. 운명에서 벗어나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 세계, 그러나 현재로는 그 세계가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있다. 다만, 다음의 시에서 이 시인이 만들어 놓은 이상향의 세계를 어느 정도 엿 볼 수 있다.
물의 나라에 가면/온통 맑은 빛으로 치장한/투명한 물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야//짙은 슬픔도 회색 빛 우울도/물의 나라에 가면/샘 솟는 기쁨과/눈부신 희망으로/힘차게 솟아오를 거야//물의 나라에 가면/보이지 않던 사랑과/알 수 없던 마음들도/거울처럼 투명하게/환히 비쳐 볼 수 있을 거야//-<물의 나라에 가면> 전문
이 시에 제시된 물의 나라는 슬픔과 우울이 기쁨과 희망으로 바뀌고, 알 수 없던 사람들의 마음들도 환히 비쳐볼 수 있는 상상적인 공간이다. 인간사회의 어두운 면을 불식시키는 공간인 물의 나라는 시인이 꿈꾸는 세계로 매우 소박한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이 앞으로 더욱 더 구체성을 띄어 제시될 것으로 보인다. 그 세계가 종교적 유토피아일지, 서정적 유토피아일지는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다만, 우리는 여기에 제시된 소박한 이상향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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