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論

[스크랩] 하이퍼시가 펼치는 이미지의 반란과 소통

그린민트 2014. 8. 29. 13:03

시 월평 

                하이퍼시가 펼치는 이미지의 반란과 소통

 

                                    정연수

 

하이퍼시(hyper poem)의 등장은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세계를 살고 있는 현실의 반영이다. 하이퍼텍스트는 단편적인 정보와 정보를 연결하는 하이퍼링크(hyperlink)를 통해 정보의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매체 이용자가 본문 중에서 한 단어를 선택하면 그 단어와 관련된 정보로 링크되는 컴퓨터 프로그램인 것이다. 하이퍼텍스트는 텍스트를 사진이나 소리 혹은 동영상과 연결하면서 정보의 가지나 네트워크 구조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무한한 정보를 창출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는 고정된 지식이 아니라, 유동의 지식, 성장하는 지식 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연결고리는 리좀(rhizome)의 사유에 닿아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수목(tree)형과 대비시켜 리좀 개념을 제기한 바 있다. 리좀은 우리말로 근경(根莖)이나 뿌리줄기에 해당한다. 줄기가 마치 뿌리처럼 땅속을 파고들어 사방팔방으로 소통하면서 뿌리와 줄기의 구별이 모호해진 상태를 말한다. 수목의 개념이 계통화하고 위계화하는 방식에 있다면, 리좀의 개념은 통일되거나 위계화되지 않은 복수성과 이질성에 있다. 리좀은 새로운 접속과 창조가 이어지면서 열린 사고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리좀은 원줄기를 지니고 있으나 수만 갈래의 뿌리줄기와 네트워크화를 이루고 있어 원줄기와 단절되어도 생명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리좀은 탈중심성, 탈고정성, 탈유한성을 지향하는 담론에서 즐겨 비유된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천 개의 고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관계이며 오직 결연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그리고…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그것은 중간에서 떠나고 중간을 통하고 들어가고 나오되 시작하고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와 다른 하나를 휩쓸어 가는 수직 방향, 횡단운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출발점도 끝도 없는 시냇물이며, 양쪽 둑을 갉아내고 중간에서 속도를 낸다."

 

대나무나 고구마 뿌리의 줄기처럼, 덩이줄기들의 뿌리가 수평적 연결을 하고 있는 리좀의 사유는 상상의 날개가 무한하게 펼쳐진다. 상하의 수직적 위계가 없으며, 시작과 끝이 없다. 리좀의 사유를 시적 이미지에 빗대고 보면 이미지의 출발점과 끝점이 없도록 무한하게 펼쳐지는 문학의 상상력과 궁합이 잘 맞는다. 리좀의 사유는 문학적 사유의 자유로움, 독자 중심의 주체적 해석 방식 등과 맥락을 함께 한다. 리좀은 이성적 사유, 전통적 시적 주제를 해체하고 있다. 또한 시인과 독자의 소통 구조를 단선적 구조에서 다양한 해석체계로 전환시켜주고 있다. 하이퍼시는 리좀의 개념을 통해 시적 사유의 고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리좀의 사유는 인과관계가 없다. 그래서 하이퍼시의 이미지 전환에 있어서도 인과관계가 필요 없다. 하이퍼시의 이미지 장면전환이 빠를 수 있는 것도 리좀의 사유, 하이퍼텍스트화에 있다. 리좀의 사유는 맥락을 통해서 읽어낸다는 점에서 맥락이 함의하는 공간에서 무한한 상상의 연결망이 펼쳐진다. 이러한 상상은 이성적이고 합리적 영역내의 상상이 아니라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 상상의 영역을 만들어낸다. 마치 이미지를 만들어놓고 다시 들여다 보면 다른 이미지로 장면이 전환되는 비고정체처럼 말이다.

『시문학』11월호에서 기획한 <확산 하이퍼시> 특집에 담긴 시 한 편을 읽어보자.

          

잘 익은 부사를 깎는다

둥굴게 깎여나간 '잘'이란 꽃뱀 한 마리

쟁반에다 또아리를 튼다

 

과도에 내 손에 닿아 끈적끈적 달라붙는 군살

 

우리집 통유리창 틈으로 들어오다 보름달이 해체된다

초승달 하현달 반달 갈고리달 둥굴게 머리 맞대고 모니터 앞에 앉아

'부사'란 단어를 검색중이다

"사과의 한 품종으로서 당도가 높고 색깔이 붉다. 품사의 하나로서 한 문장의 특정한 성분을 꾸며주는 성분 부사(잘 매우 겨우)등 그리고 문장전체를 꾸며주는

문장부사(과연 설마 제발)등"

 

내가 깎아낸 부사 쟁반을, 슬슬 기어다니는 붉은 꽃뱀을 만진다

미끈 소름이 돋는다

 

잘 깎은 내 얼굴, 속살이 달다

                - 송시월,「사과를 깎으며」전문

  

이 시에서 전달하는 이미지의 난맥은 리좀이 지닌 사유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1연에서처럼 사과 부사를 깎는 과정에서 잘 깎여진 사과 껍질이 또아리를 트는 뱀의 형상으로 갑작스럽게 전환된다. 그런데 이미지의 단절이 아니라, 연관성을 지닌다. 길게 늘어진 사과껍질의 모습이 뱀의 이미지를 닮은 때문이다. 하이퍼시는 하이퍼링크의 특징처럼 첫 이미지의 고리를 붙잡고 다음 이미지가 분화한다.

 

또 다른 리좀적 사유는 부사에서도 드러난다. ‘잘 깎는다’는 이미지에서 ‘잘’을 찾아내고, 사과 ‘부사’에서 문법 품사로서의 ‘부사(副詞)’를 찾아낸다. 언어유희적 사유는 유의어나 동음이의어의 단순한 활용인 측면에 반해 리좀적 사유는 훨씬 복잡한 네트워크 구조를 지닌다. 이 시에서처럼 ‘잘(깎다)-부사-문법 품사’의 고리 외에도 ‘잘 깎인 사과껍질-또아리 튼 꽃뱀’의 중층 구조를 지닌다. 또 전자의 고리가 관념적 세계를 구축한다면, 후자의 고리는 구체적 세계로서 서로 교차한다.

 

3연에서는 세상을 들여다보는 창으로서 ‘통유리창’과 컴퓨터의 ‘모니터’, 세상을 밝히는 ‘보름달’이 네트워크를 이룬다. 보름달은 해체되기 시작하고 보름달의 둥근 이미지는 세상을 알기 위해 머리를 ‘둥글게’ 맞대고 앉는 이미지로 전환된다. 그리고 세계는 모니터란 창을 통해 입으로 먹는 사과 ‘부사’와 입으로 말하는 문법적 품사 ‘부사’에 대한 정보의 교차가 이뤄진다.

 

4연에서는 껍질을 깎는 사과의 1연 이미지를 다시 상기시키면서 사과를 깎는 특정한 장소를 형성한다. 하지만 이 장소에는 사과 껍질만이 아니라 꽃뱀이 기어 다니면서 ‘소름’돋는 공포이미지를 형성한다.

 

이미지의 장면 전환은 5연에서 다시 한 번 이뤄지면서 극적 효과를 이룬다. ‘잘’이라는 품사 부사에 어울리게 잘 깎은 것은 사과가 아니라 소름 돋는 꽃뱀이었으며, 꽃뱀인 줄 알았던 것이 결국 ‘내 얼굴’을 깎은 것으로 극적 전환을 가져온다. 동시에 “속살이 달다”는 결구는 잘 익은 얼굴, 잘 익은 사과, 잘 깎은 솜씨를 떠올린다.

 

하이퍼(hyper)시는 시작품의 리좀적 이미지뿐만 아니라 독자의 수용적 측면에서도 리좀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안내된 노드(node)를 따라가 보면 위의 시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잘 익은 얼굴이란 잘 살아온 인격적 내면의 이미지를 반영한다. 잘 익은 사과란 물질 사회에서의 풍요나 자연의 너그러운 이미지를 투영한다. 그리고 잘 깎은 솜씨란 컴퓨터를 다루는 기술문명의 친화라든가 부사의 동음이의어에 대한 분석을 파고드는 지적 세계를 반영한다고 말이다.

『문학사상』11월호에 수록된 작품을 읽어보자.

   

거울은 이빨이 없다

연신 몸을 들락거리는 사람들, 우연히 방문하는

길가의 가로수나 구름 한 점도 소화시킬 수 없다

우물거리다가 다 토해내는

거식증 환자다

뼈만 남은

발목 하나 담글 수 없는

겨울하늘,

새들이 일찌감치 발을 뺀 공지다

나, 누구도 담지 못한

꽝꽝 얼어붙은 거울을 깬다

고해하듯

와르르 뒤뜰 담장이 무너져 내리고

조각조각 혓바닥 베인 햇살들

오랜 번민의 발자국을 안고 녹아내리는

눈 속을 뒤적이면

무청 같은 새파란 눈썹 하나 꿈틀댄다

내 안의 퀭한 거울이 배가 고프다

    - 홍일표,「거울의 식성」전문

 

이 시는 제목 ‘거울의 식성’이 반영하듯 거울을 통해 세상의 주체와 객체를 구별 없이 빨아들여 해체한다. ‘거울’과 ‘겨울’의 비슷한 어휘를 통해 전혀 다른 두 세계의 사유를 넘나든다. 거울과 겨울이 기의적인 측면에서는 다르지만, 기표적인 측면에서는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함께 어울린다. 거울에서 겨울로 이어지고, 두 의미가 단절되지 않고 어울리는 것은 리좀 사유에서 기인한다.

 

거울이 만나는 세계는 삼킨다는 측면에서 ‘이빨’이 되었다가, 보여진다는 측면에서 ‘방문’하는 장소가 된다. 또 가두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소화시키지 못하고 토해내는 거식증 환자’가 되었다가, 못 먹는다는 이미지에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이미지 ‘겨울’로 전환한다.

 

1행 거울에서 출발한 이미지는 8행에서 ‘겨울하늘’로 전환하는 순간 ‘거울’과 ‘겨울’의 이미지가 충돌한다. 그러다 곧 거식증 환자-앙상한 겨울을 통해 조화를 이루며 화해를 시도한다. 그러다가 11행 “꽝꽝 얼어붙은 거울을 깬다”에 이르면 다시 이미지가 충돌하면서 이미지의 분화가 일어난다. 이미지의 분화는 ‘무너지는 담장’, ‘녹아내리는 눈’, ‘꿈틀대는 새파란 눈썹’, ‘배가 고픈 퀭한 거울’ 등을 통해 심화된다.

이미지의 장면을 여러 개 지니고 있으면서도 분절되지 않고 네트워크화 되었다는 점에서 리좀적 사유를 보여준다. 하이퍼시의 시대가 지닌 물질과 사유를 노골적으로 반영하지는 않았지만, 전개기법의 측면에서는 리좀적이고 하이퍼시적이다.

 

하이퍼시의 전개는 철저하게 리좀의 사유를 반영하고 있다. 하이퍼의 의미자체가 리좀의 사유를 반영하는 때문일 테다. 리좀적 사유에 의한 시적 전개이든, 본격적인 하이퍼시이든 간에 모두 이미지의 분화와 결합을 의미한다. 첫 시행(혹은 시어)에서 출발한 사유(혹은 의미)가 새로 만나는 사물(혹은 사유)마다 새로운 관념과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이퍼시는 시인의 의식이 가는대로 자연스럽게 놓여있으면서도 내면적 질서를 갖추고 있다. 하이퍼텍스트가 지닌 정보의 수평적 결합처럼 말이다.

 

리좀적 사유를 담고 있는 하이퍼시는 시어 혹은 시행을 따라가다 보면 시적 주제는 더욱 탄탄해진다. 좌충우돌하는 듯한 이미지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교차되면서 더욱 탄탄한 의미를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시는 생명을 얻고 이미지는 성장을 한다.

 

리좀적 연상은 그 이미지가 다원화되고, 그 사고가 일원화되지 않지만 서로 연결망을 갖추고 있다. 이는 하이퍼시가 초현실주의의 시들과 다른 점이라 하겠다. 초현실주의 시들이 이미지조차 단절시키고 있는데 비해 하이퍼시는 이미지의 새로운 결합을 보여준다.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는 명제처럼 하이퍼시는 첫 시어의 이미지와 뒤이어지는 이미지 혹은 연상이 단절되어 있다. 하지만 그러한 단절은 영구한 단절이 아니라 또 다른 연결고리를 위한 단절이다. 결국 그 연결망은 한 편의 작품에서 충실한 의미를 지닌다. 하이퍼링크를 통해 정보가 단단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하이퍼 시가 지닌 의미의 단단함과 주제의 생명성은 하나의 주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해석, 즉 다양성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의 행은 끝이 나도 이미지의 구성은 끝나지 않고 독자들을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하이퍼시가 형성하는 이미지의 자유분방함은 시인의 의식세계를 휘젓고 있으며, 시를 읽는 독자의 의식세계를 휘젓는다. 하이퍼시에서 맛보는 정서의 매력은 언어적 유희, 발랄한 상상, 재빠른 이미지의 전환 등을 꼽을 수 있다. 자유분방한 상상을 기반으로 하던 초현주의 시에서 곤혹함을 느낀 경험은 하이퍼시의 발랄한 상상에서 안도하게 된다. 그동안 초현실주의시, 해체시, 실험시란 이름으로 전개된 시에서는 이미지의 단절이 독자를 곤혹스럽게 한 바 있다. 불충분한 시적 이미지는 독자로 하여금 추상화 감상보다 힘들게 했다.

 

이에 비추어볼 때 하이퍼시는 링크된 표지를 따라가기만 하면 편안하게 이미지를 조합할 수 있다. 이미지가 단절되었으면서도 앞뒤와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미지의 충돌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 자체로서 풍부한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하이퍼시는 이미지의 단절과 전환의 과정마다 동일성의 고리를 지니고 있어 하이퍼텍스트가 지닌 정보 확장처럼 이미지의 재생산이 가능하다.

 

리좀적 사유와 하이퍼텍스트의 구조에 닿아있는 하이퍼시는 문학의 정신이 걸어야 할 길이기도 하다. 상상이 빚은 언어의 세계, 체제와 전통을 끊임없이 해체하려는 문학정신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하이퍼텍스트나 리좀의 사유 양식으로 고리로 엮어나가는 하이퍼시의 상상력은 현대문학이 눈 여겨 보아야 할 자리이다.

 

하이퍼텍스트 즉, 리좀에서 받아들인 하이퍼시는 시인 개인의 창작 작업에서 뿐만 아니라 독자들과도 리좀적 소통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시와 독자, 시인과 독자가 끊임없이 쌍방향적 소통을 해야 한다. 소통은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성을 지녀야 하며, 시인과 독자의 수직적 위계가 아니라 수평적이고 다층적인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예컨대, 시인과 독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하이퍼시의 양산이 요구된다. 시인이 발표한 시가 독자의 이미지를 받아들여 재구성하는 창작과정, 시인과 독자가 창작에 참여해 끊임없이 변형을 이루는 과정도 하이퍼시가 시도해봄직 하다. 인터넷 공간의 소통은 이미 하이퍼시의 열린 세계를 향해 모든 준비를 마쳤다. 작품의 유통이 문예지 텍스트를 넘어서서 하이퍼텍스트의 다양한 지점에서 만나는 소통의 장을 기다려 본다. 시인과 독자의 경계를 넘어서고, 시인과 작품, 작품과 독자의 경계를 넘어서서 소통하는 리좀적 사고의 실천을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자 독자들이여 시인의 작품에 사유의 링크를 걸어보자.

 
                                                                                               태백문화와 탄광 문학 

출처 : 계간 시향
글쓴이 : 애기풀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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