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論

[스크랩] 박정원 시집 `뼈 없는 뼈` 서평/ 김명원- 애지 2010.겨울호

그린민트 2014. 8. 29. 13:05

아픈 자기 부정적 내면의 성찰

 

 

비극은 세상에서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고통을 겪고 있는 평범한 개인에게 있다.

- 조지 엘리엇

 

                        김명원 (시인, 대전대 교수)

 

 

  시인과 독자 사이에 시가 있다. 전혀 모르는 시인과 그 시인과 전혀 만난 적 없는 독자 사이에 시가 있다. 시로서만 만나는 극명한 긴장의 관계, 빛나는 외경 속에서 나는 박정원 시인의『뼈 없는 뼈』를 받아 들고 시 한편씩을 읽기 시작한다. 시집의 후반부를 넘길 무렵, 시인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칠팔년 전 쯤, 어느 시지의 문학 행사에서 잠깐 나를 본 적이 있다는 시인의 말씀이다. 송구스럽게도 내 기억에는 흔적이 없다. 얼마나 다행스러우랴. 절대 미지의 항구에서 출범한 최초의 감각에만 의존하여 시를 항해하는 기쁨은 얼마나 신선했으랴. 시인을 모를수록 시에서 발견하는 대륙과 섬들은 얼마나 전경이 되고 후경이 되었으랴.

 

  가끔 시의 미로를 헤맬수록 시인이 구축한 시영지에 끝끝내 도달하기 위해 거센 파고를 넘으면서 잡은 노에 힘을 주는 이 경탄은! 소진할수록 시인의 시들이 밝힌 등대불빛은 가까이에 와 닿고 감미로웠음에 나는『뼈 없는 뼈』에서 하선하자마자 이번 독서 경험을 박정원의 내밀한 내면 기록이라고 표기해 둔다. 나는 그를 만난 적 없지만 이제 수십 번 만난 것처럼 등가가 된다. 그의 실핏줄마저 세세히 드러나는 내면서를 충분히 해독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시인과 그의 시 사이에 독자인 내가 놓인다. 그리고 넘치는 시인과 충분한 독자 사이에 면면하고도 깊은, 글썽이는 시인의 내면이 흐른다.

 

  내면이라는 말이 함의하는 영역은 욕망, 기억, 지각, 사고 등과 같은 인간의 심리적 활동 일체가 이루어지는 폐쇄된 개인 성소일 것이다. 내면을 장소화localize하는 수사법을 적용하여 시를 창작하는 경우, 이러한 실행은 일체의 사물, 현실, 세계 따위를 외부와 대립시킨다. 이 때 내면은 은폐성, 분리성, 고립성이라는 독특한 성정을 갖춘다. 이처럼 자기 자신조차로부터 감추거나 숨겨 놓은 내면을 시라는 외부로 끌어내어 텍스트로 드러내려 하는 방식은 교훈적인 계고를 스스로에게 암시하거나 살피기 위한 행보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빛은 인간 내면 속에 존재하는 영혼의 빛이라고 하였고, 주희는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 속에서 성인의 가능성을 찾았다. 인간 자신의 내면에 좋은 삶의 원천이 자리 잡고 있다고 믿게 되면, 그것의 발견과 함양을 목표로 하는 성찰적 행위는 당연히 중요한 실천 과제가 된다. 내면성의 문학이 성립하게 하는 사상적 근거가 그러한 자각성이나 내향성에 있는 연유일 것이다. 바로 이처럼 박정원은 거침없이 자신의 내면을 성찰의 형식으로 시로서 진솔하게 고백하기에 이른다. 거기에서 어떠한 사유를 얻으려 했던 것일까, 그의 표제시로 들어서 본다.

 

 

내 몸속엔 뼈가 없지, 있다면

분해된 ㅂ이나 ㅃ, 그걸 받히고 있는 작대기

아니면 유지 내지 보수하느라 애쓰는 ㅓ 또는 ㅕ

강한 것이 아니라 아주 씁쓰름한 소프트아이스크림

단박에 부러지는 감나무가지가 아니라

송곳처럼 쭉쭉 잘도 뻗어가는 수대나무

그것들을 조각조각 꿰매어 조각보로 만들면

쓸모가 참 많지 손수건부터 멋진 머플러 까지

후하고 불면 보이지 않던 바람도 보인다니까

신났어, 뼈 없는 찻잔이라나 유리컵이라나

가만히 주워 모아 탁자에 놓으면

끼리끼리 뭔 말들이 그리 많은지

왔던 바람도 잽싸게 창밖으로 물러나곤 하지

뒤집어봐 물이 쏟아지잖아

뼈와 뼈를 이어주는 것도 물렁뼈잖아

물이었군, 내 몸에서 요동치는 것도

뼈가 아니라

뼛속 깊이 채워졌던 눈물이었군

물이나 먹어라고 말하지 말았어야했군

무심코 내뱉는 말이 곧 뼈였군

-「뼈 없는 뼈」전문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뼈 없는 뼈’라는 도발적인 규정은 모순어법oxymoron 중에서도 가장 본질을 위반한 경우이다. “뼈 없는”을 통해서 ‘뼈 없는 뼈’가 성립된다는 논리는 ‘뼈’라는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뼈’의 전존재全存在를 상실하게 만든다. ‘뼈’의 속성으로의 ‘뼈’가 폐기된 ‘뼈 없는 뼈’는 이미 ‘뼈’가 아니며, 이는 허명으로서 남겨진 단어에 다름 아니다. 이를 화자는 “내 몸속엔 뼈가 없지, 있다면/ 분해된 ㅂ이나 ㅃ, 그걸 받히고 있는 작대기/ 아니면 유지 내지 보수하느라 애쓰는 ㅓ 또는 ㅕ”라고 말한다. ‘뼈’는 ‘ㅂ이나 ㅃ’과 ‘ㅓ 또는 ㅕ’로 파편화 되고, 분절상의 기호로만 간신히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뼈’가 함의하고 있던 강인한 성질은 “강한 것이 아니라 아주 씁쓰름한 소프트아이스크림”이 되어 버렸거나 “조각조각 꿰매어 조각보로 만들”어 버릴 수밖에 없는 미미한 결과물로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화자는 이를 통해 다시 한 번 역설로 비튼다. 분해된 “ㅂ이나 ㅃ, 그걸 받히고 있는 작대기”와 “유지 내지 보수하느라 애쓰는 ㅓ 또는 ㅕ”등이 만들어낸 조각보는 쓸모가 많아서 “손수건부터 멋진 머플러 까지/ 후하고 불면 보이지 않던 바람도 보인다”고 너스레를 부린다. 흥미로운 것은 ‘뼈 없는 찻잔’이나 ‘유리컵’등을 “가만히 주워 모아 탁자에 놓”고 뒤집어 보았을 때 “물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은 바로 “뼛속 깊이 채워졌던 눈물”이었다는 것이다.

 

  뒤집어 보아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던 ‘눈물’은 역시 뒤집어진 현실을 체득하게 한다. 바로 “물이나 먹어라고 말하지 말았어야했”다는 사실과 “무심코 내뱉는 말이 곧 뼈였”다는 사실이다. 시는 말의 모방과 창조라는 면에서 다른 문학 장르 중에서 수위를 차지한다. 인간 경험의 구체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을 간명하게 드러내는 형식으로서의 시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을 감각적인 시어로 그려냄으로써 한 시대의 현장과 인간상을 도출한다. 단일 민족어라고 해도 거기에는 역사적 변천에서 비롯되는 차이와 사회적 형성에서 연유하는 차이들이 존재하며, 여러 집단에 의해 사용되는 가운데 획득한 서로 다른 의미, 음영, 강세로 인하여 말의 의미는 달라진다. 말의 혼성적 현실에 대한 예민한 감응이 문학의 중요한 속성이라는 것은 바흐친Bakhtin, Mikhail Mikhailovich 이후의 상식이지만, ‘말’이 ‘눈물’을 지칭하는 비감의 환유가 되고, 결국은 “무심코 내뱉는 말이 곧 뼈였”다는 내적 반성의 결과물 앞에서 시인은 옷깃을 여미는 것이다. 자신이 한 말들에 대해, 자신이 쓴 시들에 대해, 자신이 살아온 세월에 대해, 그 모든 뼈들에 대해, 해부의 메스를 들이댄 후 처연히 깨닫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날카로운 응시와 해찰은 다음 시에서 보다 구체적인 묘사로 이어진다.

 

사무실 마당 한쪽에 삽 한 자루가 꽂혀 있다

느낌표처럼 서서 석양을 맞는다

떨어져나간 손잡이, 긁힌 자국이 선연한 삽날,

온몸을 지탱해주던 삽자루도 비스듬히 기울었다

날이 부러지기 일쑤였으나 명령이라면

뿌리라도 파헤쳤다

지렛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기어이

뒤집고 말았다

잘려나간 잡풀은 잡풀대로

뒹구는 돌멩이는 돌멩이대로

피도 눈물도 없다고 했다

그럴수록

무뎌지는 날을 날카롭게 갈며 거칠게 몰아세웠던 삽,

이빨도 빠지고 머리마저 허옇게 세었다

서 있기에 얼마나 힘이 들까 가만히 뉘었더니

이내 드렁드렁 코를 고는 그,

입사 첫날의 웃음소리 한 삽 푸욱 떠서

다하지 못한 문장부호의 침실로 성큼 들고 싶어

땅 속 깊이 꽂혀 저녁햇살을 맞으며

오랫동안 그를 읽느라 땀깨나 흘렸을 독자께

종결어미의 신선한 만찬을 맛보이고 싶다

-「문장文章의 끝」 전문

 

  가장 쉽게 말하자면,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다. 하지만 인용시에서 박정원은 시인의 책무를 다르게 표현한다. 바로 시인은 시를 작업하는 노동자라고 말이다. 시인의 작업 현장은 시의 초입에 설치되어 있는 ‘사무실’이라는 무대 장치로부터 조명을 받고 있다. 그리고 사무실의 마당 한쪽에는 집필 도구인 ‘삽 한 자루’가 꽂혀 있다. 그 삽은 “느낌표처럼 서서 석양을 맞는” 감각으로써 벼린 예민한 공구이지만 “떨어져나간 손잡이”나 “긁힌 자국이 선연한 삽날” 등 견지해 온 시간을 예시하고자 “온몸을 지탱해주던 삽자루도 비스듬히 기울었다”고 표현된다. 시 한 편의 완성이 얼마나 지난한 작업이었는지가 오롯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휘날리는 영감으로 첫 행부터 마지막 연까지 일필휘지 단번에 쓰는 행위가 시작詩作였다면 붓방아를 찧고 마음 졸이는 한숨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었으랴. 집필의 고충은 “날이 부러지기 일쑤”였다는 비유로 이어지고, 그럼에도 시를 캐내기 위한 몸부림은 “명령이라면/ 뿌리라도 파헤쳤”고, “지렛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기어이/ 뒤집고 말았다”는 처절한 노력으로 증명된다. 시를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장에서 “무뎌지는 날을 날카롭게 갈며 거칠게 몰아세웠던 삽”은 이제 “이빨도 빠지고 머리마저 허옇게 세었”음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마모된 세월을 인지하고 있는 중이다. 시인으로서의 초심을 기억하면서 “입사 첫날의 웃음소리 한 삽 푸욱 떠서/ 다하지 못한 문장부호의 침실로 성큼 들고 싶어”서 “오랫동안 그를 읽느라 땀깨나 흘렸을 독자”들에게 “종결어미의 신선한 만찬을 맛보이고 싶다”는 열망은 시인을 영구시인이라는 직업인으로 인정하게 한다. 시인은 시를 만들 때만이 시인이다. 시를 작업하기를 그만두는 순간, 삽은 무용지물이 되며, 시인은 백수가 된다.

 

  평생을 시인으로 살기 위해 한 순간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땅 속 깊이에 시심으로 장전된 삽을 들이대고서 시어를 캐며 시 한편을 완성하기 위해 고투하는 시인의 생생한 작업 현장 묘사는 시의 마지막 행으로 인하여 지독한 땀 내음이 밴다. 문장의 끝, 종결어미 하나마저도 심사숙고하여 최고의 맛을 독자에게 선사하고자 하는 시인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오늘도 시인은 낡은 삽을 들고 젊은 삽질을 하고 있으리라. 시인은 정신적 탐닉가임을 철저히 부정하는 곳에서 박정원은 시인으로서의 소임을 출발하고 있다. 온몸을 다해 삽질을 하는 육체적 노무자로서의 시인을 증거해 보임으로써 시의 배면에 묻은 피와 노고의 그림자들을 담아낸다. 누가 문학 장르 중 가장 수월한 창작물이 시라고 하였던가. 함축과 내포와 이미지와 상징을 캐고 캐내야 하는, 캘 때마다 잡초와 돌멩이에 걸려 좌초하곤 하는, 짧은 단형 현식의 창작물이기에 종결어미 하나에도 온 몸을 기투 企投해야 하는 이 힘겨운 시작詩作을 향해 누가 신적인 영감만으로 가능한 지적 엘리트들의 여기餘技라고 할 것인가.

 

사무실 의자가 마당 한쪽으로 치워져 있다

오랫동안 몸을 내주었던 그가

나무토막처럼 굳어 있다

자리에 연연치 않겠다더니

왜 목숨을 놓았을까

수사기관에서는 그의 주검을 부검키로 했다

아무나 앉아도 되었던 의자

그 자리를 위해 끼니를 거르는 것도 예사였고

해진 방석을 안은 채 다리 하나가 빠진 의자처럼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쌓일수록

그의 집 기둥은 한쪽으로만 기울어져 있다

설상가상, 지난해 유방암으로 아내와 하직했고

한 해에 두 번쯤 발표되는 승진자명단엔

그의 이름이 빠지곤 했다

이틀 후 자살로 결론이 내려졌다

 -「바보의자」일부

 

  박정원이 성찰하는 내면은 주변의 사물들을 알레고리로 상정하는 데에서 정점을 이룬다.「바보의자」에서 ‘의자’는 운명에 대한 자폐적 존재로 풍유된다.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끼니를 거르는 것도 예사”였으며, “해진 방석을 안은 채 다리 하나가 빠진 의자처럼” 사무실에서 생애를 보냈던 한 사무원의 자살 사실을 고지하는 것으로부터 시는 시작되고 있다. 그 자살자는 유방암을 앓던 아내와 사별한데다가 승진자 명단에서는 제외되곤 하였던 사무직 근로자이었으며, 자살 후 이제는 “나무토막처럼 굳어”져 사무실 “마당 한쪽으로 치워져” 있을 따름이다. 의자는 이동하지 못하고 한 자리에서 고착된 생을 마감해야 하는 비자의적非恣意的 존재이며,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앉힐 수 없다는 점에서 극도의 수동적 존재이다. 게데가 죽음 후에는 쉽사리 치워질 수밖에 없는 용도 폐기가 용이한 사물인 것이다.

 

  사무직 근로자들의 삶이 대부분 그러할 것이다. 무한 경쟁을 통해 입사식을 치루고 들어온 처지에 복종을 규율로 삼아야 할 것이며, 실적 압박으로 개인의 행복은 회사측에 반납해야 할 것이며, 능력 있는 후배들에게 치어 승진 누락이 반복되면 퇴사 종용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한 심적 부채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선택한 자살밖에는 없을 지도 모를 일이다. 평생 의자를 지키기 위해, 의자로 살아온 그가 의자를 저버리고 죽음을 능동적으로 실천했지만 시에서 또 한번의 역설은 그를 비튼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인간적 존엄성을 위해 숭고하게 택한 죽음 이후, 그는 그저 버려지는 의자로서 사무실 마당 한쪽에 치워져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바보의자’라고 명명한다. 무참해지는 이 명명어 안에 축축한 알레고리가 스며있는 것이다.

 

  자살조차 죽음다운 죽음이 될 수 없었던, 사무직 근로자의 고단한 자살로 마감된 ‘바보의자’를 통해 어쩌면 박정원 시인은 자신의 생에의 투지를 고취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역설적 자기 부정으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작품에 나타난 표면 진술과 암시하는 내용의 구조적 모순을 통해 시인은 보다 긴장 관계를 가지는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한 연유이다. 이 희망이 주어진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운동력이라는 최초의 가치 곁에, 그 운명의 깊이와 질에 대한 명철한 인식이라는 또 하나의 가치를 지니게 한다. 그것은 본업으로서의 시인이라는 명제와 생업으로서의 사무직 근로자로 살아가야 하는 한 개인의 평범한 고통을 정면에서 맞승부하고자 했던 뼈아픈 고통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박정원 시인의 이번 시집이 아프고 빛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애지』2010.겨울호 

 

 

 

* 김명원 충남 천안 출생. 이화여대 약학과 졸업,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1996년《詩文學》으로 등단. 시집으로『슬픔이 익어, 투명한 핏줄이 보일 때까지』,『달빛 손가락』이 있음. 노천명문학상, 성균문학상,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 수상. 대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출처 : 함께하는 시인들 The Poet`s Garden
글쓴이 : 박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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